
4. 흙 종류가 이렇게 많다고? 처음 상토 고르며 겪은 혼란
식물을 키우기로 마음먹고 가장 먼저 마주한 장벽은 다름 아닌 흙이었습니다. 저는 세상의 흙이 다 똑같은 줄로만 알았습니다. 산에 있는 흙이나 길가에 있는 흙이나 그저 까맣고 축축하면 다 식물이 잘 자라는 좋은 흙이라고 믿었거든요. 하지만 원예 단지에 들어서자마자 제 눈앞에 펼쳐진 수십 가지의 흙 봉지들은 저를 깊은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상토, 배양토, 분갈이 흙, 피트모스, 코코피트 같은 생소한 단어들이 적힌 포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요. 도대체 무엇을 사야 우리 집 베란다 텃밭의 작물들이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던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상토와 배양토의 미묘한 차이에서 시작된 고민
용도에 맞는 흙 선택의 중요성
처음에는 상토와 배양토가 무엇이 다른지도 몰랐습니다. 점원에게 물어보니 상토는 주로 씨앗을 발아시키거나 모종을 아주심기 하기 전까지 키우는 용도 라고 설명해 주시더군요. 반면 배양토는 식물이 본래의 화분에서 계속 자랄 수 있도록 영양분을 배합한 흙 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무작정 가장 저렴한 일반 상토 50리터들이 한 포대를 사 들고 왔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베란다에 흙을 풀었을 때의 그 보슬보슬한 촉감은 정말 좋았습니다.
상토만 사용했을 때의 역설적인 문제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습니다. 저는 상토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고 다른 비료나 배수층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화분 가득 상토만 채워 넣고 작물을 심었지요. 상토는 배수를 위해 코코피트나 펄라이트 비중이 높아서 물을 주면 금방 빠져나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이를 간과한 채 일반 흙처럼 생각하고 물 관리를 소홀히 했더니 금세 흙이 바짝 말라버리더군요. 특히 상토는 한 번 완전히 건조되면 물을 줘도 흡수하지 않고 겉도는 성질 이 있다는 것을 그때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화분 가장자리로 물이 콸콸 새어 나가는 것을 보며 제 마음도 타들어 갔습니다.
방울토마토 곁순 제거보다 더 중요한 뿌리의 숨통
잎과 줄기에만 집중했던 초보 시절
작물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하면서 제가 가장 애지중지했던 것은 방울토마토였습니다. 모종을 심고 나서 줄기가 약 15cm쯤 자랐을 때 저는 인터넷에서 배운 대로 방울토마토 곁순 제거 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줄기와 잎 사이에서 삐져나오는 곁순을 따줘야 영양분이 열매로 간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었거든요. 매일 아침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곁순을 찾아내 손톱으로 톡톡 따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제 방울토마토는 키만 멀대처럼 자라고 잎 색깔이 점점 연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흙의 통기성이 성패를 가른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문제는 흙의 통기성 이었습니다. 제가 사용한 흙이 시간이 지나면서 다져지기 시작했고 뿌리가 숨을 쉴 공간이 부족해졌던 것입니다. 흙 속에 펄라이트나 마사토 같은 배수재를 적절히 섞어주지 않으면 뿌리가 산소 부족으로 질식한다 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지요. 겉보기에는 멀쩡해 보여도 흙 속에서는 뿌리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식물의 윗부분인 잎과 곁순에만 집착했지 정작 생명의 근원인 뿌리가 머무는 공간인 흙의 질감에는 무심했습니다. 15cm였던 방울토마토가 30cm가 넘어가도록 꽃 하나 제대로 피우지 못하는 것을 보며 식물 재배의 기본은 흙의 물리성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오이 수분 관리와 상토의 보수력 상관관계
단 하루의 실수가 부른 참사
오이를 키우기 시작했을 때는 또 다른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오이는 수분 함량이 높은 작물이라 물을 정말 많이 필요로 합니다. 저는 오이를 심은 화분에 매일 아침 정성껏 물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한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딱 하루 물주기를 걸렀던 적 이 있습니다. 정확히 24시간 정도 물을 주지 못했는데 퇴근 후 돌아와 본 오이 잎은 마치 얇은 습자지처럼 힘없이 축 처져 있더군요.
보수력을 결정하는 흙의 성분
오이 수분 공급 이 끊기면 성장이 순식간에 멈추고 이미 맺힌 작은 열매들도 금방 노랗게 변하며 떨어져 버립니다. 이때 제가 깨달은 점은 상토의 보수력 이 얼마나 중요한가였습니다. 제가 선택한 저가형 상토는 물 빠짐은 좋았지만 수분을 머금고 있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만약 흙에 피트모스 함량이 더 높았거나 보습을 도와주는 질석을 조금 더 섞었다면 하루 정도의 가뭄은 충분히 견뎠을 것입니다. 오이의 잎이 10cm 이상 넓어지기 시작하면 증산 작용이 활발해져서 흙의 수분 보유 능력이 작물의 생사를 결정짓는다 는 것을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다음에는 반드시 보수력이 좋은 기능성 상토를 사용하겠다고 다짐하며 처참하게 말라버린 오이 줄기를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깻잎 벌레와 오염된 흙이 가르쳐준 교훈
재사용 흙의 위험성
마지막으로 저를 괴롭혔던 것은 깻잎 벌레 들이었습니다. 깻잎은 비교적 키우기 쉬운 작물이라 생각하고 남는 화분에 대충 흙을 채워 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깻잎 뒷면에 아주 작은 검은 점들이 생기더니 순식간에 구멍이 숭숭 뚫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벌레가 어디서 날아온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예전에 쓰던 흙을 제대로 소독하지 않고 재사용했던 것이 화근 이었습니다.
위생적인 환경이 맛있는 채소를 만든다
오래된 흙 속에는 해충의 알이나 곰팡이 포자가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깻잎처럼 잎을 직접 먹는 작물은 흙의 청결도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저는 그저 흙이 아까워 그냥 쓴 것이지요. 깻잎 벌레를 잡기 위해 친환경 살충제를 뿌려보기도 했지만 이미 흙 속에 자리를 잡은 유충들을 박멸하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길이 5cm 정도의 어린 깻잎들 이 벌레들에게 갉아 먹히는 것을 보며 흙을 고를 때는 반드시 멸균 처리된 새 흙을 써야 한다 는 기본 원칙을 다시금 가슴에 새겼습니다. 특히 베란다 같은 폐쇄된 공간에서는 한 번 번진 해충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기 때문에 흙의 위생 상태가 곧 농사의 성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패를 통해 배운 최고의 흙 배합
결국 초보 농부였던 저의 첫 텃밭 도전은 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수많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습니다. 흙은 단순히 식물을 지탱하는 지지대가 아니라 수분을 공급하고 공기를 소통시키며 영양을 전달하는 살아있는 생태계 였습니다. 이제는 흙 봉지 뒷면의 성분표를 유심히 살펴봅니다. 코코피트가 몇 퍼센트인지, 펄라이트의 입자 크기는 어떠한지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비싼 영양제나 화려한 도구보다 중요한 것은 작물의 특성에 맞는 적절한 배합의 흙 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다음 농사에서는 작물의 종류에 따라 흙을 직접 배합해 보며 식물들이 마음껏 뿌리를 뻗을 수 있는 최고의 집을 만들어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