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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고추 지주대 안 세웠다가 비 오고 쓰러진 날

by !lifestyle 2026. 2. 22.

 

초보 농부의 근거 없는 자신감과 고추 모종의 성장

처음 텃밭을 시작했을 때의 그 설렘을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종묘상에서 튼실해 보이는 고추 모종 10주를 사 왔을 때만 해도 제 마음은 이미 풍년이었죠. 당시 모종의 길이는 겨우 15cm 남짓 이었는데, 작은 포트 안에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이 정말 기특했습니다. 정성스레 밭을 일구고 밑거름을 넉넉히 넣은 뒤 식재 간격을 40cm 정도로 유지하며 정성껏 심어주었습니다. 심은 지 2주가 지나자 고추는 무서운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하더군요. 줄기는 제법 굵어졌고 잎도 손바닥 절반 크기만큼 넓어졌습니다. 그때 주변 어르신들이 지주대를 빨리 세워야 한다고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속으로 '이렇게 줄기가 빳빳하고 튼튼한데 벌써 지주대를 세울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더 자라면 그때 세워도 늦지 않겠지라는 안일한 생각 이 문제였습니다. 고추 키가 30cm를 넘어 40cm 정도 되었을 때도 저는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방울토마토 곁순 제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던 탓도 있었습니다. 곁순을 제때 따주지 않으면 영양분이 분산되어 열매가 작아진다는 말에 방울토마토에만 온 신경을 쏟았거든요. 정작 고추가 보내는 위험 신호는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말입니다.

세차게 몰아친 밤비와 처참하게 꺾여버린 현장

사건은 며칠 동안 이어지던 가뭄 끝에 찾아온 단비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기상청에서는 비 소식을 전했고, 저는 마침 물 주기가 귀찮았던 터라 잘됐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밤사이 빗줄기가 굵어지더니 강한 바람까지 동반하더군요. 창밖으로 들리는 거센 빗소리에 잠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우리 집 고추들의 강인함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텃밭으로 달려나간 저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당하게 서 있던 고추 모종 10주 중 7주가 처참하게 바닥에 누워 있었습니다. 비에 젖은 흙은 물러져 있었고, 무거워진 잎과 열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줄기들은 하나같이 한쪽 방향으로 쓰러져 진흙 범벅이 되어 있었죠. 특히 그중 한 주는 지면에서 약 5cm 윗부분이 완전히 꺾여버려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며칠 전부터 꽃이 피고 작은 고추가 2cm 정도 맺히기 시작했기에 그 상실감은 더욱 컸습니다. 지주대 하나 세우는 그 10분의 수고를 아끼려다 한 달 넘게 키운 노력이 물거품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텃밭 관리의 기본을 망각한 대가와 다른 작물들의 수난

고추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텃밭 농사는 정말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날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쓰러진 고추를 일으켜 세우며 옆을 보니 깻잎 벌레 습격도 심각하더군요. 3일 정도 비가 올 것 같아 약을 치지 않고 방치했더니, 그사이 벌레들이 깻잎 뒷면에 알을 까고 구멍을 숭숭 뚫어 놓았습니다. 깻잎은 한 번 벌레가 먹기 시작하면 잎의 식감이 거칠어지고 상품 가치가 떨어지는데, 15cm 정도로 예쁘게 자랐던 잎들이 순식간에 망가진 것 을 보니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오이 재배에서 놓친 디테일

또한 오이 농사에서도 실수가 발견되었습니다. 오이 수분 은 열매의 모양과 성장에 직결되는데, 물 주기를 단 하루 걸렀더니 흙이 말라 작물이 스트레스를 받은 모양이었습니다. 수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열매가 끝부분만 뭉툭하게 자라거나 노랗게 변하며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벌들이 날아와 자연스럽게 수정해주길 기다리기만 했던 것도 패착이었습니다. 시설 재배가 아닌 노지 텃밭이라 하더라도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한 날에는 인공 수분이라도 도와주었어야 했는데 , 저는 고추 지주대 고민만큼이나 오이의 생리 현상에도 무지했습니다.

무너진 고추를 살려내며 배운 지주대의 중요성

비가 그친 뒤 저는 부랴부랴 철물점으로 달려가 1.2m 길이의 고추 지주대 20개를 사 왔습니다. 이미 쓰러진 녀석들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우며 지주대를 깊숙이 박았습니다. 뿌리가 다칠까 봐 조마조마하며 줄기에서 약 10cm 떨어진 곳에 지주대를 설치 하고 부드러운 원예용 끈으로 '8자 묶기' 를 해주었습니다. 너무 꽉 묶으면 줄기가 굵어지면서 상처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책에서 찾아보고는 적당히 여유를 두어 묶어주었습니다. 쓰러졌던 고추들은 줄기에 묻은 진흙을 닦아내고 지주대에 몸을 기대자 겨우 기운을 차리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꺾여버린 줄기 사이로 병균이 침투할까 봐 걱정이 되어 살균제도 살짝 뿌려주었습니다. 고추는 뿌리가 얕게 뻗는 천근성 작물 이라 키가 40cm 이상 자라고 열매가 달리기 시작하면 비바람에 지탱할 힘이 전혀 없다는 것을 왜 진작 몰랐을까요? 15cm였던 아기 모종이 어느덧 제 무릎까지 자랐을 때, 녀석들은 이미 지지할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농사를 위한 뼈아픈 반성과 새로운 다짐

이번 사건을 통해 저는 텃밭 농사가 단순히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식물의 성장 속도에 맞춰 미리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농부의 역할이었습니다. 지주대는 고추가 쓰러지는 것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통풍을 원활하게 하여 탄저병 같은 무서운 병해를 예방하는 역할 도 한다는 것을 이제야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향후 관리 계획

  • 적기 지주대 설치: 다음번에는 고추 키가 20cm 정도 되었을 때 바로 1차 지주대를 세우겠습니다.
  • 병충해 예방: 깻잎 벌레 유무를 매일 아침 잎 뒷면을 뒤집어보며 확인하겠습니다.
  • 성장 단계별 조치: 방울토마토 곁순 제거를 소홀히 하지 않고 일주일에 두 번은 꼼꼼히 살피겠습니다.
  • 인공 수분 보조: 오이 수분이 원활하도록 아침 일찍 수꽃을 따서 암꽃에 문질러주는 정성을 들일 생각입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들 하지만, 텃밭에서의 실패는 생명을 잃는 일이라 마음이 참 아픕니다. 하지만 쓰러졌던 고추들이 다시 태양을 향해 잎을 뻗는 모습을 보며 저도 다시 힘을 내봅니다. 여러분도 혹시 지주대 세우기를 미루고 계신가요? 비 소식이 들리기 전에 지금 바로 밭으로 나가보시길 바랍니다. 준비된 자만이 수확의 기쁨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오늘 다시 한번 가슴에 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