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트 고추 한 봉지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된 90일
마트에 가면 한 봉지에 천 원이면 살 수 있는 고추가 왜 그렇게 소중하게 느껴졌을까요? 평소 식탁에 당연하게 올라오던 채소들이 사실은 얼마나 긴 시간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지 텃밭을 직접 가꾸기 전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은 제가 작은 텃밭에서 고추 한 개를 온전히 수확하기 위해 보냈던 치열하고도 감동적인 90일간의 기록을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단순히 식물을 키우는 법이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과 기다림의 미학 을 배운 그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고추 모종을 심고 시작된 설레는 기다림
처음 텃밭을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선택한 작물은 역시 활용도가 높은 고추였습니다. 시장에서 아주 튼튼해 보이는 모종을 몇 개 사 와서 정성스럽게 밭에 옮겨 심었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금방이라도 고추가 주렁주렁 열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식물의 시간은 사람의 마음처럼 급하게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뿌리 내리기와 첫 꽃의 탈락
고추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는 데에만 꼬박 2주가 걸렸습니다. 그동안 저는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혹시라도 시들지 않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뿌리가 자리를 잡자 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고 첫 번째 꽃이 피었을 때의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작은 흰 꽃이 고개를 숙이고 피어난 모습이 얼마나 가녀리고 예쁘던지요.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첫 꽃은 열매로 이어지지 못하고 툭 떨어져 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식물이 자신의 몸집을 먼저 키우기 위해 방아다리에 핀 첫 꽃은 스스로 떨어뜨리거나 사람이 직접 따주는 것이 좋다 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잎이 무성해지고 방아다리라고 불리는 갈림길이 생기기까지 약 한 달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방울토마토 곁순 제거와 오이 수분의 어려움
텃밭에는 고추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추가 자라기를 기다리는 동안 옆에 심어둔 방울토마토와 오이들도 저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지요.
끝없는 전쟁, 방울토마토 곁순 제거
특히 방울토마토 곁순 제거 는 정말 끝이 없는 전쟁 같았습니다. 원줄기와 잎줄기 사이에서 쑥쑥 돋아나는 곁순을 제때 따주지 않으면 영양분이 분산되어 정작 열매가 부실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매일같이 텃밭으로 나갔습니다. 하루만 걸러도 어느새 손가락만큼 굵어진 곁순을 발견할 때면 식물의 무시무시한 생명력에 경이로움마저 느꼈습니다.
벌과 나비 대신 붓을 든 오이 수분
오이는 또 어땠을까요? 오이는 수분 과정이 정말 중요했습니다.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데 벌들이 날아와 자연스럽게 오이 수분 을 도와줘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작은 오이 열매가 맺히다가 그냥 노랗게 말라 죽어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원인을 찾아보니 도시 텃밭이라 그런지 벌이 부족해 수분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었지요. 결국 저는 붓을 들고 직접 인공 수분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길이 15cm쯤 됐을 때 아삭하게 씹히는 그 맛을 상상하며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 관리했습니다. 하지만 자연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깻잎 벌레와 물 관리의 혹독한 대가
고추가 어느 정도 자라나고 있을 무렵 이번에는 깻잎이 말썽이었습니다. 깻잎은 키우기 쉽다고 들었는데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구멍 숭숭 뚫린 잎, 깻잎 벌레와의 사투
깻잎 벌레 들이 밤새 파티를 벌였는지 아침에 나가보면 잎사귀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 일쑤였거든요. 하나하나 손으로 잡아보기도 하고 친환경 방제제를 뿌려보기도 했지만 벌레들과의 속도전에서 이기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가장 예쁘게 자란 잎만 골라 먹는 벌레들 을 보며 속상해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단 하루의 실수가 부른 참사
가장 뼈아픈 실수는 바로 물 관리였습니다.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던 날 개인적인 사정으로 물 주기를 딱 하루 걸렀더니 다음 날 고추와 토마토 잎들이 완전히 축 처져서 땅에 닿을 듯 말 듯 하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 급히 물을 주었지만 이미 몇몇 잎은 끝이 타버린 뒤였습니다. 특히 고추는 물이 부족하면 칼슘 흡수가 제대로 안 되어 열매 끝이 썩어 들어가는 배꼽썩음병 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90일 중 단 하루의 게으름이 그동안의 노력을 헛되게 만들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습니다.
마침내 마주한 15cm의 기적과 앞으로의 다짐
심은 지 약 3개월이 거의 다 되어가던 어느 날 드디어 제 손바닥보다 조금 큰 길이 15cm쯤 되는 아주 매끈한 고추 하나 가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초록색이었던 것이 조금씩 검붉은 빛을 띠더니 마침내 완벽한 빨간색으로 변했습니다.
땀방울로 거둔 빨간 고추 하나
그 고추 하나를 따기 위해 제가 보낸 수많은 새벽 물주기와 벌레 잡기 그리고 곁순 제거의 시간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가위로 조심스럽게 고추를 수확할 때의 그 묵직한 손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막상 수확하고 나니 이 작은 것 하나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는지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실패를 통해 배운 교훈과 다짐
이번 농사의 실패 원인을 분석해 보니 초기에 밑거름을 충분히 주지 않았던 것 과 장마철 배수 관리에 소홀했던 점 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다음 농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보완하려고 합니다.
- 정식 전 토양에 충분한 유기질 퇴비 를 넣어 밑거름을 강화하겠습니다.
- 병해충이 창궐하기 전, 친환경 자재를 이용해 예방 위주의 방제 를 실천하겠습니다.
- 장마철 뿌리 썩음을 방지하기 위해 두둑을 높게 쌓고 배수로를 정비 하겠습니다.
여러분도 혹시 베란다나 작은 땅에서 작물을 키우고 계신가요? 결과물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 속에 담긴 시간과 노력은 그 무엇보다 값집니다. 고추 하나를 따기 위해 기다린 3개월은 저에게 단순한 식재료 이상의 가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농부님들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하게 된 것은 물론이고 제 삶도 식물처럼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성장해야 한다는 소중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여러분의 텃밭 농사도 항상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