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이 덩굴의 폭주와 초보 농부의 당혹감
처음 텃밭을 시작했을 때 제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뿐이었습니다. 싱싱한 오이를 따서 바로 아삭하게 베어 무는 그 환상적인 장면 말이죠.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종묘상에서 튼실해 보이는 오이 모종 네 개를 사다가 정성스럽게 심었을 때만 해도 제 앞날에 시련이 닥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오이는 정말 무서운 속도로 자라더군요. 심은 지 불과 14일 정도 지나자 줄기가 제 허리춤까지 올라왔고, 3주가 넘어가니 지지대를 타고 올라가는 속도가 거의 폭주 수준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오이가 알아서 잘 자라주는 효자 작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잎만 무성해지고 도무지 열매가 달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었습니다. 옆집 텃밭 베테랑 어르신은 벌써 손가락만 한 오이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계셨는데, 제 텃밭의 오이들은 그저 초록색 잎들만 펄럭이며 자기들끼리 덩굴손을 꼬아대기 바빴습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방울토마토 곁순 제거는 나름대로 공부해서 꼼꼼히 해줬는데, 오이는 곁순을 어떻게 쳐줘야 하는지조차 몰라 쩔쩔매던 시기였습니다. 무성하게 자란 잎사귀 사이로 노란 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을 때, 저는 드디어 결실을 보는구나 싶어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하지만 그 기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암꽃과 수꽃을 구분하지 못한 7일간의 기다림
꽃이 피었으니 당연히 그 자리에 오이가 열릴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아침마다 텃밭으로 달려가 꽃 아래를 살폈지만, 꽃은 피었다가 하루 이틀이면 허망하게 시들어 떨어져 버리더군요. "왜 열매가 안 맺히지? 영양이 부족한가?" 싶어서 애꿎은 비료만 더 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주일 정도를 허송세월하며 시들어가는 꽃잎만 바라보았습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가 보았던 그 수많은 꽃들은 모두 수꽃이었습니다. 오이는 한 포기 안에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단성화 작물이라는 기초적인 상식조차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잎을 들춰보던 중 평소와는 조금 다른 형태의 꽃봉오리를 발견했습니다. 꽃받침 아래쪽에 아주 작고 가느다란, 마치 2cm 정도 되는 미니 오이 모양의 씨방이 붙어 있는 꽃 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그토록 기다리던 암꽃 이었습니다. 반면 수꽃은 기다란 꽃대 끝에 꽃만 덩그러니 달려 있었죠. 이 간단한 차이를 몰라서 일주일 내내 수꽃만 보며 오이가 왜 안 열리냐고 한탄을 했던 제 모습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모릅니다. 암꽃은 줄기 마디마디에서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는데, 잎이 너무 무성해서 제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특히 오이 수분 이라는 개념을 몰랐던 저에게는 이 암꽃의 발견이 마치 보물찾기에서 보물을 찾은 것과 같은 희열을 주었습니다.
벌이 오지 않는 도시 텃밭에서 시도한 인공 수분
암꽃을 발견했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 텃밭은 도심 한복판에 있는 작은 옥상 공간이었는데, 생각보다 벌이나 나비 같은 매개 곤충들이 자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암꽃이 피어도 수분이 되지 않으면 그 작은 아기 오이는 금세 노랗게 변하며 말라 죽어버립니다. 실제로 길이 3cm쯤 되었을 때 기대를 잔뜩 품고 지켜보던 아기 오이가 다음 날 가보니 툭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상심했는지 모릅니다. 실패 원인을 분석해 보니 결국 자연 수분이 원활하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직접 '사랑의 메신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슬이 채 마르기 전인 오전 8시에서 10시 사이 가 수분 성공률이 가장 높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행동에 나섰습니다. 싱싱하게 핀 수꽃 하나를 똑 따서 꽃잎을 조심스럽게 제거한 뒤, 안쪽의 꽃가루 뭉치를 암꽃의 암술머리에 톡톡 문질러주었습니다. 마치 정밀한 수술을 집도하는 의사처럼 숨을 죽이고 한 땀 한 땀 인공 수분을 진행했지요. 이렇게 인공 수분을 해준 지 며칠이 지나자, 정말 신기하게도 암꽃 아래의 씨방이 하루가 다르게 통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5cm, 10cm를 넘어 드디어 15cm쯤 되었을 때 그 매끈하고 가시 돋친 오이의 자태를 보며 느꼈던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물 주기와 거름 조절 실패가 남긴 뼈아픈 교훈
하루만 걸러도 축 처지는 오이의 갈증
오이를 키우며 가장 힘들었던 점 중 하나는 바로 물 관리였습니다. 오이는 구성 성분의 90% 이상이 수분이라 물을 정말 많이 먹는 작물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 번은 급한 일이 생겨 물 주기를 단 하루 걸렀더니 , 그 뙤약볕 아래서 오이 잎들이 축 처져서 마치 종잇장처럼 변해 있더군요. 깜짝 놀라서 얼른 물을 주었지만, 이미 스트레스를 받은 오이는 그 뒤로 모양이 이상하게 휘어지는 '곡과' 현상 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쓴맛이 나는 오이가 열리는 이유도 알고 보니 불규칙한 관수와 고온 스트레스 때문 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습니다.
웃자람 현상과 5마디 이하 곁순 제거
또한, 욕심이 과해 질소질 비료를 너무 많이 준 것도 화근이었습니다. 깻잎 벌레 를 잡느라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오이 잎이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보다 더 크게 자라길래 잘 자라는 줄만 알았죠. 하지만 정작 열매로 가야 할 영양분이 모두 잎과 줄기로만 가는 '웃자람' 현상 이 발생해 정작 오이는 몇 개 따지도 못했습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초기 성장을 억제하고, 오이가 맺히기 시작할 때 추비를 적절히 나누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특히 아래쪽 5마디까지의 암꽃과 곁순은 과감히 제거해 줘야 뿌리가 튼튼해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배운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초보 농부의 성장통과 앞으로의 다짐
이번 오이 농사는 솔직히 절반의 성공이자 절반의 실패였습니다. 암꽃과 수꽃을 구분하지 못해 우왕좌왕했고, 수분 과정의 중요성을 간과했으며, 물 주기 하나 제대로 맞추지 못해 모양이 비뚤어진 오이를 수확했으니까요. 하지만 직접 손으로 인공 수분을 해주고, 그 작은 생명이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얻은 인사이트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멀리서 잎의 모양만 봐도 이 녀석이 목이 마른지, 영양이 부족한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겼습니다. 다음에는 모종을 심을 때부터 지지대를 더 튼튼하게 세우고, 처음부터 곁순 제거를 철저히 해서 바람이 잘 통하게 만들어줄 생각입니다. 그러면 벌레 피해도 줄고 오이 수분도 훨씬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겠지요. 또한 오이의 길이가 20cm를 넘기기 전에, 가장 맛있고 연할 때 수확하는 타이밍도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비록 초보 농부의 어설픈 일지였지만, 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기록을 남깁니다. 텃밭 가꾸기는 단순히 작물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을 배우고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낍니다. 여러분의 텃밭에도 곧 싱싱하고 곧은 오이가 주렁주렁 매달리기를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