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어느 봄날, 문득 책장 구석에 꽂혀 있던 지난 다이어리를 펼쳐보다가 얼굴이 화끈거리는 경험을 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 저는 스스로를 '가식 없고 쿨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곤 했습니다. 돌려 말하는 것을 시간 낭비라 여겼고, 소위 팩트(Fact)를 꽂아주는 것이 상대방의 성장을 돕는 가장 빠른 길 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차분히 돌아보니 그건 솔직함이라는 가면을 쓴 명백한 무례함 에 불과했습니다.

블로그를 운영하거나 조직 생활을 치열하게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소통의 딜레마에 빠집니다. 특히 당장 성과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타인의 감정을 살피는 것을 비효율적이라고 치부해버리곤 합니다. 오늘은 제가 겪었던 처절한 실패의 경험을 통해, 왜 솔직함이 무례함이 되어서는 안 되는지, 그리고 진정한 소통이란 무엇인지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이 글은 정보성 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저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저의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팩트라는 무기로 상처를 주었던 지난날
과거의 저는 일명 '팩트 폭력배'였습니다. 회의 시간이나 동료와의 대화에서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죠. 그 당시에는 그것이 저의 유능함을 증명하는 방식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논리가 완벽하면 상대방도 납득할 것이라는 오만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효율성만 따지다 놓친 관계의 본질
한번은 팀 내 주니어 직원이 작성한 기획안을 검토하는 자리였습니다. 제 기준에서 볼 때 논리 구조가 엉성하고 뒷받침할 데이터가 부족해 보였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동료들이 다 듣는 와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거 지금 기획안이라고 가져온 건가요? 데이터 출처도 불분명하고 논리가 전혀 없잖아요. 다시 해오세요. 우리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맙시다."
제 딴에는 빠르고 명확한 피드백을 주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빙빙 돌려 말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으니까요. 하지만 그 직원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어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그 직원은 저에게 사적인 말을 걸지 않았고, 회의 시간에도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업무 효율을 높이겠다고 던진 말이 오히려 팀의 소통 채널을 완전히 막아버린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당시 프로젝트 진행 속도는 오히려 30% 이상 지연되었습니다. 관계가 깨진 상태에서의 협업은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 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나는 뒤끝 없다는 말의 위험성
흔히 화를 내고 난 뒤 "나는 뒤끝은 없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 또한 그 문장을 방패처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상처를 준 사람은 쿨하게 잊고 뒤끝이 없을지 몰라도,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는 영원한 흉터로 남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 부정적인 피드백이나 공격적인 언사는 뇌의 편도체를 자극하여 '투쟁 혹은 도피(Fight or Flight)' 반응을 일으킨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제가 쏟아낸 날카로운 말들은 상대방의 이성적인 사고를 마비시키고 방어 기제만 작동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뒤끝 없다'는 말은 가해자의 자기 합리화일 뿐, 결코 소통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2025년에도 변하지 않는 소통의 중요성
기술이 발전하고 AI가 업무의 많은 부분을 대체하는 2025년이 되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 교류는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영역입니다. 아니, 오히려 기술적 완벽함보다 인간적인 공감 능력 이 더 중요한 핵심 역량이 되었습니다. 제가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는 단순히 말투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솔직함이 무례함으로 변질되는 임계점 분석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솔직함이고, 어디서부터가 무례함일까요? 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관계의 단절을 겪은 끝에 그 경계선을 구분하는 기준들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급진적 솔직함 - Radical Candor의 오해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경영 지침서인 '급진적 솔직함(Radical Candor)'을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이 이론의 핵심은 '개인적 관심(Care Personally)'이 바탕이 된 상태에서 '직접적 대립(Challenge Directly)'을 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 관심, 즉 신뢰와 애정은 생략한 채 직접적 대립만 일삼았습니다. 킴 스콧(Kim Scott)의 4분면 모델에 따르면 이는 '불쾌한 공격(Obnoxious Aggression)' 에 해당합니다. 솔직함이 성립되려면 "나는 당신이 잘 되기를 바란다"는 진정성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그 진정성이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지적은 그저 비난이자 공격일 뿐입니다.
메라비언의 법칙이 시사하는 비언어적 요소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 가장 유명한 '메라비언의 법칙'은 대화에서 말의 내용은 겨우 7%만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나머지 93%는 목소리의 톤(38%)과 표정, 태도 같은 시각적 요소(55%)가 결정합니다.
제가 과거에 했던 말들을 녹음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내용은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지만, 목소리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고 표정은 경멸에 가까웠습니다. 텍스트로만 보면 문제없어 보이는 말도, 비언어적 요소가 공격적이라면 그것은 명백한 무례함입니다. "잘 좀 하지 그랬어" 라는 말이 걱정으로 들릴 수도, 비아냥으로 들릴 수도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심리적 안정감이 성과에 미치는 영향
구글의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는 고성과 팀의 공통점을 연구했습니다. 결론은 바로 '심리적 안정감(Psychological Safety)' 이었습니다. 팀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말해도 비난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 조직의 성과는 극대화됩니다.
저의 무례한 솔직함은 이 심리적 안정감을 파괴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 또 깨지겠지?"라는 두려움이 생기면, 아무도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지 않습니다. 결국 제 행동은 팀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팀의 잠재력을 갉아먹고 있었던 셈입니다. 2023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자료에 따르면, 무례함을 경험한 직원의 48%가 의도적으로 업무 노력을 줄인다고 합니다. 수치로 증명된 저의 실패였습니다.
무례함을 벗어던지기 위한 구체적인 시도들
실수를 인정한 후, 저는 화법과 태도를 바꾸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았지만, 의식적인 훈련을 통해 조금씩 관계를 회복해 나갔습니다. 제가 실제로 적용했던 방법들을 공유합니다.
주어 바꾸기 연습 - You 대신 I Message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은 '너(You)'로 시작하는 문장을 '나(I)'로 시작하는 문장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 Before: "너는 왜 보고서를 이렇게 썼어?" (비난)
- After: "나는 이 보고서의 데이터 부분이 조금 더 보강되었으면 좋겠어." (바람 전달)
주어를 '나'로 바꾸면 상대방을 공격하지 않고도 내 의견을 명확히 전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상대방의 방어 기제를 낮추고 대화의 내용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강력한 효과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입에 붙지 않아 메모지에 적어가며 연습했습니다.
피드백 샌드위치 기법의 한계와 대안 (COIN 모델)
칭찬으로 시작해서 지적하고, 다시 칭찬으로 끝내는 '샌드위치 기법'도 시도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영혼 없는 칭찬은 오히려 역효과를 냈습니다. "잘했어, 근데 이건 틀렸어, 그래도 수고했어"라는 식의 화법은 상대방에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중간에 있는 비판이구나"라는 불신만 심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방법을 바꿨습니다. 맥락(Context), 관찰(Observation), 영향(Impact), 다음 단계(Next steps)를 포함하는 COIN 모델 을 활용했습니다.
- Context(상황): "지난주 클라이언트 미팅 때..."
- Observation(관찰): "목소리가 작아서 전달이 잘 안 되는 부분이 있었어요."
- Impact(영향): "그래서 클라이언트가 우리 제안에 확신을 갖지 못한 것 같아요."
- Next Steps(제안): "다음번에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해보면 어떨까요?"
이렇게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사실 기반으로, 감정을 배제하고 인과관계를 설명하니 상대방도 훨씬 잘 받아들였습니다.
감정을 배제하지 않고 인정하는 대화법
아이러니하게도, 무례하지 않으려면 내 감정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했습니다. 예전에는 화가 나면 그 화를 '팩트'라는 포장지에 싸서 던졌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지금 제가 이 상황 때문에 조금 당황스럽네요" 라고 제 감정 상태를 먼저 알립니다.
감정을 언어화하면, 그 감정에 휘둘리지 않게 됩니다. 또한 상대방에게도 내가 지금 예민한 상태임을 알림으로써 오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건강한 '솔직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정한 솔직함은 상대를 위한 배려에서 시작된다
긴 터널을 지나온 지금, 저는 솔직함의 정의를 다시 내렸습니다. 솔직함은 내 속이 시원하고자 뱉어내는 배설구가 아닙니다. 상대방과 우리 관계, 그리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가장 적절한 정보를 가장 배려 깊은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 입니다.
신뢰 자산(Trust Asset)의 축적 과정
통장 잔고처럼 인간관계에도 '신뢰 자산' 이 존재합니다. 평소에 따뜻한 말 한마디, 경청하는 태도로 신뢰를 저축해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필요한 쓴소리를 했을 때, 상대방이 인출을 허락합니다. 잔고가 바닥난 상태에서 쓴소리를 하려고 하니 부도가 났던 것입니다.
지금은 동료들에게 먼저 다가가 "요즘 힘든 건 없나요?"라고 묻습니다. 업무 외적인 대화도 나누며 유대감을 쌓습니다. 이렇게 쌓인 신뢰 위에서 건네는 피드백은 더 이상 '폭력'이 아니라 '뼈 있는 조언'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커리어 성장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독자에게 정보를 전달할 때, 가르치려 들거나 내 지식을 뽐내기보다 독자의 입장에서 무엇이 궁금하고 무엇이 어려울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저의 실패 경험이 여러분에게 작은 울림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혹시 지금 "나는 솔직한 사람이야"라는 말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나요? 그 솔직함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한 번쯤 멈춰 서서 생각해보시길 권합니다.
2025년의 우리는 더 똑똑해졌지만, 여전히 따뜻한 말 한마디에 위로받고 차가운 말 한마디에 상처받는 존재들입니다. 진정한 고수는 부드러움 속에 강함을 숨기고 있습니다. 저도 아직 연습 중입니다만, 적어도 이제는 솔직함과 무례함을 착각하여 소중한 사람을 잃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여러분의 소통은 안녕하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