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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시작했다가 금방 그만둔 이유

by !lifestyle 2026. 1. 14.

 

기록을 시작했다가 금방 그만둔 이유와 극복 과정

2025년의 해가 밝은 지도 벌써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러분의 새해 다짐은 안녕하신가요? 매년 1월이 되면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는 다이어리와 플래너가 산처럼 쌓이고, 유튜브에는 소위 '갓생'을 살기 위한 각종 기록법 영상이 넘쳐납니다. 저 역시 그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호기롭게 새 노트를 펼치고 최고급 만년필을 결제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제 책장 한구석에는 앞장만 까맣게 적혀있고 뒷부분은 새하얀 백지로 남은 수첩들이 수두룩합니다. 도대체 왜 우리는 기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것을 꾸준히 지속하지 못하는 걸까요? 단순히 나의 의지가 약해서, 혹은 게을러서라고 치부하기에는 뭔가 억울하지 않으신가요?

저는 저의 수많은 실패 경험을 곰곰이 되짚어보며, 기록을 지속하지 못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과 심리적 장벽 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들어 보았습니다. 이 글은 저의 처절한 실패담이자, 다시 펜을 잡기 위해 분석한 기록의 해부학입니다. 저와 같은 고민을 하고 계신 분들께 작은 위로와 해답이 되기를 바랍니다.

완벽주의라는 이름의 함정

 

기록을 시작하자마자 실패로 이끄는 가장 큰 적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속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완벽주의'였습니다. 처음에는 의욕이 넘쳐서 내 삶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기록하려 들지만, 바로 그 비장한 마음가짐이 독이 되어 돌아옵니다.

예쁘게 꾸미려는 강박관념

혹시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저도 한때는 예쁜 스티커와 형형색색의 펜, 마스킹 테이프를 잔뜩 구매했습니다. 기록의 본질은 그 안에 담긴 '내용'인데, 어느새 화려한 형식이 내용을 압도해버리는 주객전도 현상 이 발생한 것입니다.

글씨를 조금이라도 삐뚤게 쓰거나 오탈자가 나면, 견딜 수 없는 스트레스를 받으며 그 페이지 전체를 찢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시달렸습니다. 이는 기록을 나를 위한 '데이터의 축적'이 아니라,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작품'으로 인식했기 때문 입니다. 실제로 인지심리학에서는 과도한 시각적 정보 처리가 뇌의 피로도를 급격히 높인다고 합니다. 예쁘게 쓰려다 에너지가 고갈되어 정작 써야 할 내용을 못 쓰는 상황, 기록은 남을 위한 쇼가 아니라 철저히 나를 위한 도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적으려는 욕심

2025년형 최신 플래너를 샀을 때, 저는 하루의 일정을 10분 단위로 쪼개고 물 마시는 횟수, 수면 시간, 읽은 책 페이지 수, 심지어 영양제 섭취 여부까지 모두 기록하려 했습니다. 초기 며칠간은 이런 데이터가 쌓이는 게 뿌듯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인지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자아 고갈(Ego Depletion)'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데, 우리의 의지력도 배터리처럼 사용하면 소모되는 자원이라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까지 모두 기록하려는 시도는 뇌에 엄청난 과부하를 줍니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책상에 앉아, 오늘 마신 물 컵 수를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제 모습은 주체적인 기록자가 아니라 기록의 노예 같았습니다. 결국 그 부담감에 짓눌려 다이어리를 펴는 것 자체가 공포로 다가왔습니다.

빈 공간에 대한 공포와 학습된 무력감

하루라도 기록을 빼먹으면 실패한 것 같다는 생각,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저는 3일 정도 여행을 다녀오거나 아파서 기록을 못 하면, 텅 빈 페이지를 보며 엄청난 좌절감을 느꼈습니다. '이미 망했어, 이번 달은 틀렸어'라는 생각이 들면서 그 이후로는 아예 다이어리를 쳐다보지도 않게 되더군요.

이를 심리학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다'는 식의 '학습된 무력감' 과 연결 지을 수 있습니다. 빈 공간은 그냥 빈 공간일 뿐인데, 거기에 '실패'라는 꼬리표를 붙인 건 바로 제 자신이었습니다. 기록은 연속성이 중요하지만, 그 연속성이 잠시 끊겼다고 해서 전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도구의 배신과 장비병의 말로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옛말이 있지만, 기록 초보자인 저는 유독 도구 탓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패드부터 노션(Notion), 옵시디언(Obsidian), 에버노트, 고가의 몰스킨 노트까지 안 써본 도구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도구가 오히려 기록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디지털 도구의 높은 진입장벽

노션이 유행이라길래 저도 남들처럼 거창한 대시보드를 만들었습니다. 복잡한 데이터베이스를 연결하고, 함수를 넣고, 감성적인 커버 이미지를 찾느라 주말 내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작 그 안에 채워 넣을 글은 한 줄도 쓰지 못한 채 말입니다.

이런 현상을 '생산성 포르노(Productivity Porn)'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생산적인 일을 할 준비만 하다가 정작 생산적인 일은 하지 않고 쾌감을 느끼는 현상 이죠. 디지털 도구는 기능이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어떤 태그를 달지, 어떤 폴더에 넣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마찰 비용(Friction Cost)'이 발생합니다. 기록은 1초 만에 끝나야 하는데, 앱을 켜고 로딩을 기다리고 폴더를 찾는 데 10초가 걸린다면? 우리의 뇌는 본능적으로 그 귀찮은 행동을 거부하게 됩니다.

아날로그 감성의 치명적 불편함

디지털에 지쳐 아날로그 만년필과 가죽 노트를 샀습니다. 종이에 닿는 사각거리는 필기감은 좋았지만, 검색이 불가능하다 는 치명적인 단점에 부딪혔습니다. 3개월 전에 적어둔 아이디어를 찾으려니 노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뒤져야 했습니다.

효율성이 떨어지니 기록의 효용감을 느끼지 못했고, '어차피 써봤자 나중에 못 찾는데 왜 쓰지?'라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또한, 물리적인 부피도 문제였습니다. 무거운 노트를 매일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은 생각보다 큰 체력 소모를 요구했습니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도구는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잦은 도구 변경에 따른 데이터 파편화

이게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1월은 종이 다이어리에, 2월은 아이패드 굿노트에, 3월은 노션에... 이렇게 기록이 흩어지다 보니 내 삶의 궤적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습니다. 데이터가 파편화되니 지난 기록을 통해 인사이트를 얻는 '회고'가 불가능했습니다. 기록의 진정한 가치는 과거의 데이터를 통해 미래를 개선하는 데 있는데, 도구를 자꾸 바꾸다 보니 데이터베이스가 축적되지 않은 것입니다. 도구를 바꾸는 행위 자체가 도파민을 분비시켜 마치 새로운 시작을 하는 듯한 착각을 주지만, 실상은 제자리걸음일 뿐이었습니다.

목적 없는 기록이 불러온 권태

방법론과 도구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Why(왜)'의 부재 였습니다.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성공한 사람들은 다 한다니까 무작정 따라 했을 뿐, 정작 내가 왜 기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이 없었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보여주기식 기록

솔직히 인정하겠습니다. 초반에 제가 쓴 일기들을 다시 읽어보면, 마치 누군가 훔쳐볼 것을 대비해서 쓴 글 같았습니다. 부끄러운 감정이나 실수보다는, 멋져 보이는 생각과 성과 위주로 적었습니다. SNS에 '#공스타그램', '#미라클모닝' 해시태그를 달아 올리기 위한 용도였던 셈입니다.

진정성이 결여된 글쓰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아니라, 가상의 청중을 위한 연극 대본을 쓰는 시간이었으니까요. 내면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기록은 감정 해소(Catharsis) 기능을 하지 못했고 , 결국 숙제처럼 느껴져 금방 흥미를 잃었습니다.

피드백 루프의 부재

기록만 하고 다시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적어놓고는 책장을 덮으면 끝이었습니다. 기록이 내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주지 못한다고 느끼니 동기부여가 될 리 만무했습니다. 행동경제학에서는 즉각적인 보상이 행동 강화에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기록의 효과는 지연되어 나타납니다. 오늘 적은 메모가 1년 뒤에 아이디어가 되어 돌아오는데, 당장 눈앞의 변화가 없으니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막연한 기대감과 현실의 괴리

"기록을 하면 인생이 바뀐다"는 자기계발서의 문구를 맹신했습니다. 적기만 하면 저절로 부자가 되고, 다이어트가 되고, 업무 효율이 오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기록은 마법의 지팡이가 아니라 지도일 뿐입니다. 지도를 그렸으면 걸어가야 하는데, 저는 지도만 예쁘게 그리고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실행(Action) 없는 기록(Archive)은 죽은 데이터입니다. 현실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으니 기록하는 행위 자체가 허무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 위해 내려놓은 것들

그렇다면 저는 지금 기록을 포기했을까요? 아닙니다. 수많은 실패 끝에 저는 아주 느슨하고 게으른 기록자가 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힘을 빼니 비로소 기록이 이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형식을 파괴하고 본질에 집중하기

이제 저는 예쁜 템플릿을 쓰지 않습니다. 스마트폰 기본 메모장이나 카카오톡 '나와의 채팅'을 가장 많이 활용합니다. 줄이 안 맞아도 되고, 오타가 나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휘발되는 생각을 '포착(Capture)' 하는 것이지, 그것을 예쁘게 가공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루 한 줄 쓰기'라도 괜찮습니다. 아니, '오늘 점심 맛있었음' 같은 단순한 단어 나열이라도 좋습니다. 기록의 문턱을 지하 10층까지 낮췄습니다. 부담이 없으니 매일 할 수 있고, 매일 하다 보니 어느새 습관이 되었습니다.

분류보다는 검색을 믿기

폴더 정리에 집착하던 습관을 버렸습니다. 대신 날짜와 핵심 키워드만 적어둡니다. 디지털 도구의 강력한 검색 기능을 믿기로 한 것이죠. 태그를 다는 데 1초도 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모든 것을 한곳에 몰아넣고(Inbox), 나중에 필요할 때 검색합니다. 정리 정돈에 대한 강박을 버리니 기록이 놀이처럼 편안해졌습니다. '나중에 정리해야지'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냥 쌓아두는 것만으로도 내 뇌의 외장 하드디스크 역할을 충분히 해내고 있으니까요.

나를 위한 솔직한 대나무 숲

이제는 남에게 절대 보여줄 수 없는 지질하고 유치한 감정도 가감 없이 적습니다. 상사에 대한 욕, 미래에 대한 불안, 질투심 같은 날것의 감정을 쏟아냅니다. 그러자 비로소 기록이 저에게 위로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정신과 의사들이 권장하는 '저널 테라피(Journal Therapy)' 의 효과를 몸소 체험하고 있습니다. 멋진 문장을 쓰려 노력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배설한다는 느낌으로 씁니다. 그러자 기록하는 시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진부한 말이 기록의 세계에서는 진리였습니다. 수십 권의 다이어리를 버리고 나서야, 저는 저만의 속도와 방법을 찾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작심삼일로 끝난 다이어리를 보며 자책하고 계신가요? 괜찮습니다. 그건 여러분의 의지 탓이 아니라, 너무 잘하고 싶었던 열정 탓이었을 테니까요. 2025년, 거창한 계획 대신 삐뚤빼뚤한 메모 한 장으로 다시 시작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번에는 힘을 쫙 빼고 말이죠.